전시 소개 ABOUT THE EXHIBITION
뒤셀도르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소정의 두 번째 국내 개인전 《채집록 (Field Notes)》이 2024년 《야간비행 (Night Dreamer)》 이후 2년 만에 디아컨템포러리에서 열린다.
첫 국내 개인전 이후 이소정은 독일을 중심으로 개인전과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하며 작업의 지평을 확장해왔다. 2025년에는 이소정의 독일 내 활동을 본격적으로 확장한 두 차례의 주요 성과가 있었다. 작가는 레클링하우젠 시가 1948년부터 수여해온 독일 최초의 공공 현대미술상인 제40회 《쿤스트프라이스 융어 베스텐 2025—회화(Kunstpreis junger westen 2025—Malerei)》에 선정되었다. 독일 전역에서 약 690명의 작가가 지원한 가운데 최종 22인에 포함되어 레클링하우젠 미술관(Kunsthalle Recklinghausen)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같은 해에는 졸링겐 미술관(Kunstmuseum Solingen)이 주관하는 제79회 《국제 베르기셰 미술전(Internationale Bergische Kunstausstellung)》에도 선정되었다. 1946년 시작된 이 전시는 독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현대미술전 중 하나로, 2025년에는 약 200명의 지원자 가운데 15명의 작가만이 최종 선정되었다. 두 전시를 통해 이소정의 회화는 독일 동시대 미술의 맥락 안에서 그 가능성과 확장성을 다시 한 번 확인받았다.
이소정 작가는 독일에서 생활한 시간이 10년을 넘어서면서 이주 경험을 다루는 작가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초기 작업에서 낯선 언어와 문화, 타지에서 살아가는 불안과 고독이 직접적인 정서적 동력으로 작용했다면, 이제 그것들은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감각적 조건이 되었다. 어느 도시에서든 시간은 흐르고 하루는 반복되지만, 오랫동안 타인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살아온 경험은 익숙하다고 믿었던 풍경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완전히 낯설지도, 온전히 익숙하지도 않은 상태를 오가는 시선은 평범한 현실의 표면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고, 《채집록 (Field Notes)》은 바로 그 틈에서 시작된다.
전시 제목인 '채집록'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류하고 기록하는 문서를 연상시키지만, 이소정이 채집하는 것은 명확한 형태를 지닌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루가 지나간 뒤에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감각, 무심히 지나쳤으나 뒤늦게 되살아나는 장면, 정확한 원인을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의 잔여물에 가깝다.
작가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불러내고, 서로 무관해 보이는 순간들을 하나의 화면 안에서 다시 배열한다. 이 과정에서 기억은 과거를 온전히 복원하는 자료가 아니라, 현재의 감각과 무의식에 의해 끊임없이 변형되고 재구성되는 가변적인 이미지가 된다
이소정의 회화에서 현실과 상상은 서로 대립하는 두 영역이 아니다. 구체적인 일상의 장면들은 꿈과 기억을 통과하면서 낯선 관계를 맺고, 짧은 단막극처럼 압축된 서사로 전환된다. 작가는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기보다 기억 속에서 생략되고 과장되며 뒤섞인 요소들을 몽타주하듯 결합한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비롯된 이미지들은 하나의 장면 안에 공존하고, 화면은 실제 경험과 잠재된 감정이 중첩되는 심리적 무대로 변모한다.
이번 전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불청객'은 이러한 변환을 가시화하는 핵심적인 존재이다. 가방 안에 숨은 개구리, 담장에 매달린 불가사리, 케이크 진열장에 자리 잡은 작은 쥐, 악몽의 잔상처럼 드리워진 그림자는 현실의 인과관계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현실과 무관한 초현실적 장식이나 서사를 위한 기발한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평온한 일상의 표면 아래 축적되어 있던 불안과 욕망, 소외감과 긴장이 예기치 않은 형태로 출현한 감정의 징후에 가깝다.
불청객은 처음에는 화면의 질서를 교란하며 위화감을 발생시키지만,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변의 사물과 인물,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낯선 존재가 어느 순간부터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이 과정은 이소정의 회화가 작동하는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일상 바깥의 기이한 세계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상 안에 잠재해 있었지만 쉽게 인식되지 않았던 감정과 징후를 드러낸다. 친숙한 장면은 낯설어지고, 이질적으로 보였던 존재는 다시 익숙한 현실의 일부가 된다.
인물은 이러한 경계적 공간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중심축이다. 이소정의 인물들은 사건을 주도하거나 분명한 감정을 전달하기보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잠시 멈춰 선 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감각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들의 시선과 몸짓은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제시하지 않고, 장면의 전후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화면 속 인물과 불청객, 사물 사이에 형성되는 모호한 관계는 관람자를 서사의 외부에 머무는 관찰자가 아니라, 불완전한 기억을 함께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참여자로 이끈다.
이소정에게 회화는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통로라기보다 현실을 더욱 오래, 깊이 들여다보기 위한 방법이다. 가장 사소한 기억은 꿈과 무의식을 통과하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반복되는 일상은 낯선 풍경으로 다시 태어난다. 《채집록 (Field Notes)》에 놓인 장면들은 완결된 이야기의 삽화가 아니라, 현실과 꿈, 기억과 상상이 서로 침범하며 만들어낸 잠정적인 기록이다. 작가는 오늘도 무심히 흘려보낸 하루의 파편을 되짚어 그 안에 머물던 감정과 낯선 존재를 채집한다. 그렇게 캔버스에 옮겨진 기록들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 우리 각자의 일상에도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과 보이지 않는 불청객이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조용히 환기한다.